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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소식

[연세 뉴스] 백양로에 새긴 자유와 민주의 함성

연세대학교 홍보팀 / news@yonsei.ac.kr
2020-04-28

백양로에 새긴 자유와 민주의 함성 

대한민국 민주화에 헌신한 연세인을 돌아보다


 

연세 창립 135주년을 맞은 올해는 역사적으로도 뜻깊은 해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사의 중요 사건인 ‘4·19혁명 60주년’과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 격변의 시기 속에서 우리 대학교는 국내 최고 명문사학으로서 진리의 힘과 자유에 대한 신념을 기반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았다. <연세소식>에서는 창립 135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연세인들을 소개하는 특별한 코너를 마련했다. 백양로에 새긴 연세인들의 자유와 민주의 함성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가슴 속에 울려 퍼지고 있다.




1. 정석해 교수(1899~1996) 

학생들과 함께 4‧19혁명 시위를 주도하다



1917년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해 문과로 전과한 정석해 선생은 1919년 연희전문 Y.M.C.A. 회장으로 활동하며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독립선언문 4,000매를 인쇄해 3월 5일 서울역전과 남대문 일대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 겸 유학길에 올랐으며,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담하였다. 1939년 귀국 후 일제의 감시로 고향에서 칩거하다가 1945년 해방 후 연희전문 교수로 취임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교무처장, 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0년 4‧19혁명 당시 시위 학생들과 함께 경무대 앞까지 다녀와 4.25 교수단 시위 주도자의 한 명으로 활동했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정부의 60세 정년 방침에 따라 1961년 강제로 정년퇴직했으나, 이후 1981년까지 시간 강사로 모교 강단을 지켰다. 1964년 대일굴욕외교에 반대하는 교수와 지식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2. 김찬국 교수 (1927~2009) 

평생 인권 운동에 앞장선 진보 신학자 



1946년 연희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해 1950년 신학과 1회 졸업생이 되었다. 대학원을 거쳐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54년 이래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60년 4‧19혁명 때에는 시위대와 광화문까지 함께 행진하였으며 동료교수들과 가두 모금활동도 벌였다. 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시위에 학생보다 앞장섰으며, 1971년 군인들에 의해 학생회관에 있던 학생들이 끌려나오자 이에 항의하다 폭행을 당학도 했다. 1973년 연말과 1974년 연초 개헌청원서명운동에 참여하여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해직되었다가, 1980년 3월에 복직했으나 신군부 집권 이후 다시 해직, 1984년에 복직했다. 평생 인권운동에 앞장선 진보적 신학자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992년 정년퇴임한 뒤 1993년부터 1999년까지는 재단 문제로 위기에 처해있던 상지대 총장을 맡아 학원 정상화에 큰 역할을 맡기도 했다.



3. 최정규 동문 (1941~1960)

4‧19혁명에서 산화한 젊음 


 

1959년 연세대 이과대 의예과에 입학한 최정규 동문은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불쌍해 빨리 커서 성공하겠다”고 이야기하던 착한 아들이었다. 그가 2학년이 되던 1960년 4월 19일 아침, 의과대생들은 학생회 간부들을 주축으로 당시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 건물 현관에 모였다. 시위대는 남대문을 돌아 시청쪽으로 향했고 시청앞 광장에서 신촌캠퍼스를 떠난 본교 학생들과 오후 1시 20분경 만나 행동을 함께했다. 시위대가 광화문에 가까워지면서 의과대학 학생들이 선두에 섰다. 자신들이 입은 하얀 가운이 경찰들의 무차별 진압을 막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순진한 희망이었다. 경찰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쓰러진 학생들 사람들 사이에서 최정규가 발견됐다. 그는 바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다. 만 19세의 꽃 같은 나이였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부조는 현재 우리 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이만섭 동문 (1932~2015)

고 김주열 군의 죽음을 보도한 참된 언론인



1950년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재학 시절 응원단장을 맡아 ‘털보응원단장’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주일 특파원, 주미 특파원 등을 지냈다. 정치부의 열혈기자였던 그는 4‧19혁명의 출발이 되었던 2.28 대구학생시위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무술경관들에게 구타당하는 어린 학생들을 구해주었고, 4‧19혁명 때는 최루탄이 이마에 박혀 숨진 김주열 군의 참혹한 주검을 빼돌리려 한 자유당 정권의 저열한 음모를 추적 보도하기도 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직후 윤보선 대통령의 기자회견 중 ‘민정이양’에 관한 언급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해 구속되기도 했다. 1963년 정치인으로 변신해 2004년 정계의퇴를 선언할 때까지 국회의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며 “쓴소리 의회주의자”라 불렸다.  



5. 홍성엽 동문(1953~2005)

YWCA 위장결혼식의 가짜 신랑

1973년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1974년 유신독재 정권에 저항에는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규탄하는 대자보를 붙인 일로 구속되고 만다. 5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지만 1975년 2·15 조치로 형집행정지가 되어 풀려난다. 1979년 11월, 박정희 대통령 사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의원 간선제로 국무총리 최규하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려 하자 재야인사들은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기 위해 ‘위장 결혼식’을 계획한다. YWCA에서 가짜 결혼식을 진행해 사람들을 모으고 시국선언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 ‘가짜 신랑’ 역할을 맡겠다고 자원한 이가 바로 홍성엽 동문이다. 단박에 ‘통대선거저지대회’로 돌변한 결혼식 행사장에 경찰이 난입하고 강제 해산 끝에 구속된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에도 민청련의 초대 총무, 민통련의 홍보부장으로 활동하며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멈추지 않았다. 백혈병 발병으로 오랜 투병생활 끝에 별세한 그는 정작 실제 생활에서는 성혼하지 못했다. 그의 배우자는 ‘민주주의’였다. 



6. 기형도 동문 (1960~1989)

소외당한 개인의 아픔과 좌절을 노래한 시인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들은 원체 말이 없었다”며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던 기형도 시인. 그는 1979년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해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연세문학회 활동을 하며,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철야농성과 각종 교내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연세춘추』가 주관하는 “박영준문학상”과 “윤동주문학상”을, 그리고 교지 『연세』의 백양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졸업 후 중앙일보의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동아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으며, 소외당한 개인의 아픔과 좌절을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7. 김흥겸 동문(1961~1997)

도시 빈민의 벗으로 살다 간 맑은 사람 



1981년 신학과에 입학한 그는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1983년 봄, 루스채플 예배에서 선보인 파격의 기도를 시작으로 연대 교정에서 펼친 거리극 ‘누가 예수를’ 등을 통해 독재 타도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빈민들이 주로 살던 서울 관악구 신림동(일명 낙골)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도시빈민운동에 앞장서고 대규모 철거 반대투쟁 등을 주도했다. 신대방동 철거 현장에서 싸우다 구속돼 석 달간 징역살이를 했던 그는 위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고인’이 휠체어에 앉아 문상객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파격의 장례식을 통해 삶을 향한 진지하고 치열한 태도를 보여줬다. 서른 여섯의 나이 하나님 곁으로 돌아간 그는 생전에 산문과 시, ‘민중의 아버지’, ‘빈민의 함성’ 등 여덟 편의 노래도 남겼다. 



8. 정성희 동문(1962~1982)

강제징집, 첫 군의문사 희생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불의에 눈감지 못했던 정의로운 이. 1981년 영독불계열로 입학한 그는 입학 직후 문무대 훈련 때부터 ‘시위를 선동하고 노래를 선창했다’는 이유로 문교부의 관리 학생 리스트에 올랐다. 홍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해 활동했던 그는 시국 문제를 다룬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하는 일을 했다. 1981년 11월 25일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는 학내 시위가 벌어지고 정성희 동문은 전투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된 뒤 연락이 두절된다. 강제징집이 된 그는 이듬해 1월 전방으로 자대 배치되고 이미 학원 소요 관련자로 관리 대상에 올랐던 터라 부대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1982년 7월 23일 자정,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된 그의 죽음에 대해 군 당국은 자살이라고 주장한다. 군에서도 “또 백양로를 걸어보고 싶다”던 정성희 동문의 죽음은 끝내 모든 증거가 인멸된 가운데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9. 이한열(1966~1987)

최루탄으로 쓰러진 6월 항쟁의 상징



1986년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고향 광주에서 몸으로는 겪었으나 의미를 채 알지 못했던 광주민주항쟁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군부독재와 민주주의의 탄압에 분노한 그는 만화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고민을 글과 그림으로 많이 남겼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했으나 또한 섣부르게 나서는 대신 조심스럽고 진중했다. 때로 무력이 동원되는 시위가 두렵다고도 했다. 그래도 앞에 서야만 할 때는 용기와 의무감을 갖고 나섰다. 그가 2학년이 된 1987년,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하고 전두환 정권은 차기대권을 자신의 후계자에게 물려주기 위해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는 헌법을 고수하겠다는 ‘호헌선언’을 한다. 분노한 국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6월 9일 연세대에서도 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출정식이 열렸다. 이한열 동문은 교문 맨 앞에서 시위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고 전경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혼자 먼 길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10. 노수석(1976~1996)

토끼몰이식 경찰 진압의 희생자 

1995년 법학과에 입학한 노수석 동문은 1996년 3월 29일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결의대회’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받아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던 GNP 대비 교육재정 5% 확보가 지켜지지 않아 대다수 사립대학 등록금이 20% 가까이 오르고 있었다. 노수석 동문을 포함한 대학생들은 이에 항의하며 평화적 집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례적으로 폭력적인 검거 위주의 진압 작전을 펼쳤다. 노수석 동문은 을지로의 한 인쇄소로 몸을 피했으나 의식을 잃었다. 인쇄소에 함께 있던 다른 집회 참여자들은 노수석 동문의 구조를 요청했지만 경찰은 이를 거부했고, 뒤늦게 도착한 119 구급대가 국립의료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부검 결과 경찰의 시위 진압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는 부인되었다. 이후 노수석 동문은 1999년 2월에 95학번 동기들과 함께 연세대학교 명예졸업장 받았으며, 2003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도움주신 분들>

● 인물 자문 : 사학과 김성보 교수

● 자료 제공 : 연세대학교 박물관, 연세민주동문회, 노수석열사추모사업회 

 - 연세민주동문회 : 1987년 6월 이한열 동문의 최루탄 피격을 계기로 교정에 모이게 된 동문들이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 힘을 모으고자 다짐해 같은 해 9월 국내 최초로 설립한 대학민주동문회이다. 

 - 노수석열사추모회 : 노수석 동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업회로서 고인을 기리는 추모사업과 연세대학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vol.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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